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더 플레밍 (문단 편집) === 플로리와 체인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Howard_Walter_Florey_1945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Ernst_Boris_Chain_1945.jpg|width=100%]]}}} || || [[하워드 플로리]] || 언스트 체인 || ||<-2> (사진 출처: [[위키피디아]]) || 하워드 월터 플로리(Howard Walter Florey, 1898년 9월 24일~1968년 2월 21일)는 호주 출신의 의사, 약리학자, 병리학자이며, 언스트 보리스 체인[* 독일 출신이므로 에른스트 샤인(?)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.](Ernst Boris Chain, 1906년 6월 19일~1979년 8월 12일)은 독일계 영국인 화학자였다. 참고로 체인은 [[유대인]]이었기에 [[홀로코스트]]를 피하기 위해 1933년 4월 2일에 단돈 10파운드[* 당시 환율로 2016년의 632파운드(2016년 6월 15일 기준으로 약 105만원)]만 들고 영국에 도착했다고 한다. 1938년, 체인 및 노먼 히틀리(Norman Heatley, 1911년 1월 10일~2004년 1월 5일)와 함께 연구를 하던 플로리는 플레밍의 페니실린 연구에 대한 기사를 읽고 라이소자임과 페니실린 연구를 시작했다. 이후 상기한 바와 같이 페니실린의 정제에 성공하여 첫 번째 환자인 앨버트 알렉산더(Albert Alexander, 1897년~1941년 3월 15일)에게 페니실린을 투약했으나 양이 충분치 못해서[* 정확히는 초반에는 페니실린에 의한 차도를 보였으나, 페니실린의 양이 부족해서 부득이하게 치료를 중단하는 바람에 다시 악화되어 사망한 것이다.] 사망했다. 이에 플로리와 체인은 상대적으로 양이 덜 필요한 아이들 위주로 실험을 했다. 게다가 이 와중에 [[제2차 세계대전]]이 터져 유럽이 난리통이 되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지조차 불명확한 상황이었으나, 1941년 6월에 운 좋게도 [[존 데이비슨 록펠러|록펠러 재단]]이 원조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보냈다. 이에 플로리과 연구진은 미국의 [[일리노이]] 주, 피오리아(Peoria)로 이동하여 대량 생산을 위해 분투했고, 1942년 말에 썩은 멜론에서 발견된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[* 페니실리움 노타툼과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은 [[https://www.ncbi.nlm.nih.gov/genome/?term=Penicillium%20chrysogenum|현재는 같은 종으로 분류한다.]]]을 토대로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. 이 대량 생산된 페니실린은 임상실험을 거치자마자 곧바로 전쟁 중인 유럽으로 전달되어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을 구했다. 게다가 이 페니실린은 5년 뒤인 [[6.25 전쟁]]에서도 활약하여 수많은 장병들을 구했다. 그런데 1945년, 플로리는 저 연구는 어디까지나 과학적 관심이었을 뿐이고 약의 발견은 덤이었다고 밝혔다. >사람들은 저와 다른 연구진들이 고통받는 인류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페니실린을 연구했다고 때때로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. 고통받는 인류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. 흥미로운 과학 실험이었고, 그런 의미에서 약이 생겨났다는 건 매우 기쁘긴 합니다만, 그걸 위해 연구를 시작한 건 아닙니다. >- 하워드 플로리, 《오스트레일리지언 사이언스》라는 잡지에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